
경북 의성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 결국 천년고찰 고운사의 보물 건물까지 집어삼키며 국가유산에도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26일 국가유산청이 발표한 ‘산불 관련 국가유산 피해 현황’에 따르면, 보물로 지정된 고운사 연수전과 가운루가 이번 산불로 전소됐다.
이로써 단순한 산림 피해를 넘어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잿더미로 변하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졌다.
고운사는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유서 깊은 사찰로, 문화재청에 등재된 다양한 국가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다.
이 중 연수전은 조선시대 국왕이 나이가 들어 기로소에 입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로, 이 같은 기념 용도의 건축물 중 원형을 온전히 간직한 유일한 사례다.
2020년 8월 보물 제211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단청과 벽화가 금단청이라는 희귀한 기법으로 이뤄져 있으며,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됐다.
고운사의 또 다른 보물인 가운루 역시 함께 전소되면서, 이번 산불은 단순한 지역적 피해를 넘어 문화유산의 회복 불가능한 손실로 이어지게 됐다.
특히 고운사는 산불 위협을 감지하고 대웅보전 석가모니 후불탱화, 불상, 현판, 고서 등 주요 유물들을 급히 의성 조문국박물관 수장고로 이송했다.
그러나 보물 고운사 석조여래좌상은 산불 확산으로 인해 의성에서의 이동이 불가능해져 결국 안동 청소년문화센터로 우회해 긴급 보관됐다.
문화재계는 고운사 연수전의 전소를 두고 “대한제국기 황실 문화와 조선 후기 기념비적 건축의 연결고리가 소실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화재가 단순히 하나의 사찰 건물 소실이 아닌, 한 시대의 역사적 증거가 사라졌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날 기준, 산불로 인해 피해를 입은 문화유산은 보물 2건, 명승 2건, 천연기념물 1건, 시도지정문화재 3건 등 총 8건에 이른다.
문화재청은 정선 백운산 칠족령 일부가 소실된 이후 전국적으로 산불 피해가 확대되자 이날 오후 ‘국가유산 재난 위기 경보’를 최고 수준인 ‘심각’ 단계로 격상했다.
한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로 유명한 안동 만휴정은 다행히 피해를 비껴갔다.
만휴정은 앞서 소실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관심을 모았지만, 국가유산청의 현장 확인 결과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일부 주변 소나무에서 그을림 흔적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산불의 확산에 따라 국가유산청은 긴급 대응에 돌입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에 대해 선제적 보호 조치를 시행 중이다.
특히 봉정사는 국보 극락전, 대웅전, 보물 보조관음보살좌상 등 귀중한 국가유산을 다수 보유한 사찰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물 이송을 병행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봉정사에 있는 유물의 일부는 현재 긴급 이송 조치 중에 있으며, 하회마을 인근의 민속유산 역시 안전 확보를 위한 관계자 투입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문화재청과 국가유산청은 이번 화재로 인해 지역민의 안전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 심각한 위협에 노출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현장 대응을 넘어 장기적인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 강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했다.
문화계에서는 화재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할 수 있는 체계적인 대응 시스템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특히 이번처럼 산악 지형에 위치한 사찰이나 전통건축물의 경우 진화 장비 접근이 어렵고 소방 인프라가 부족해 더욱 큰 피해를 입기 쉽다.
국가유산청은 앞으로 문화유산 방재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고, 유사 시 문화재 이송 절차, 보관처 확보, 헬기 및 인력 지원 등 대응 체계를 정비할 방침이다.
이번 의성 산불은 산림 피해를 넘어 문화와 역사의 상징이 함께 무너져 내리는 참담한 재난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천년의 역사를 품은 고운사의 일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금,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방안 마련이 절실하다.
이소율 (lsy@sabanamedia.com) 기사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