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스포츠의 상징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페이커 이상혁이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경기 결과와 기록을 넘어, 선수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발언이었다.
이상혁은 18일 서울 종로구 롤파크 LCK 아레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은퇴 이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4년 뒤의 내 모습이 나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계획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명확한 길이 있지는 않다”며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뜻깊은 경험들로 채워나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은퇴 이후의 삶을 하나의 목표나 역할로 규정하기보다는, 경험의 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이상혁은 T1의 전신인 SK텔레콤 T1에서 데뷔한 이후 12년간 한 팀에서만 활약한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다. 2022년 체결한 재계약으로 올해 말까지 팀에 남을 예정이었지만, 최근 재계약 발표로 2029년까지 T1과의 동행을 이어가게 됐다. 이 결정에 대해 업계 안팎에서는 사실상 종신 계약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e스포츠 선수에게 20대 중후반은 흔히 기량 하락이 시작되는 시기로 여겨진다. 이상혁 역시 내년이면 서른 살이 된다. 그는 이에 대해 “나이가 들어도 어느 정도 기량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게 돼 뿌듯하다”며 “어리고 쟁쟁한 선수들이 많아 힘들겠지만, 가능한 한 오래 선수로 활약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이에 대한 부담보다는 도전에 대한 의지가 더 크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상혁이 지금까지 쌓아온 성과는 e스포츠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월즈’로 불리는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에서 통산 6회 우승을 차지했고, 대회 사상 최초로 쓰리핏, 즉 3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e스포츠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초대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리그 오브 레전드 전설의 전당 1호 헌액자라는 상징적인 타이틀도 얻었다. 최근에는 국내 비시즌 단기 컵 대회인 케스파 컵 우승까지 추가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다시 한 번 갱신했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넥스트 페이커’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젠지의 미드 라이너 쵸비 정지훈을 가장 인상적인 선수로 꼽았다. 이상혁은 “상대할 때마다 재미있고, 올 한 해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정지훈은 올해 세계 최대 게임 시상식인 더 게임 어워드에서 ‘최고의 e스포츠 선수’로 선정되며 존재감을 입증했다.
화려한 기록 이면에는 쉽지 않았던 과정도 있었다. 올해 월즈는 T1에게 유독 험난한 대회였다. 국내 정규 리그 LCK에서의 부진으로 4번 시드로 간신히 진출한 T1은 플레이인 단계부터 경기를 치러야 했다. 이상혁은 “전체적으로 순탄한 적이 없었다. 플레이인부터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며 “경기력이 완벽하지 않았지만 팀원들이 다전제 경험을 많이 갖고 있었던 점이 큰 도움이 됐다”고 돌아봤다.
특히 중국 LPL의 강호 애니원즈 레전드와의 8강전 마지막 5세트는 팬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됐다. 정글러 오너 문현준이 실전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문도 박사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팀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지만 이상혁은 “너무 안 박으면서 해봐”라는 말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는 “그 순간에는 그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며 “경기는 언제나 이길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니 승패보다 과정에 더 집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상혁은 패배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고 밝혔다. 그는 “2017년 월즈 결승에서 패배한 뒤 눈물을 흘렸던 감정이 지금은 다시 올라오지 않아 열정이 식은 건 아닌지 고민한 적도 있다”며 “언제부터인가 패배가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열정은 그대로다”고 말했다. 분노나 좌절이 아닌 성찰의 재료로서 패배를 받아들이는 시선이 엿보인다.
은퇴 이후의 삶, 그리고 결혼 계획에 대한 질문에도 그는 현재에 집중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결정된 것은 없다”며 말을 아끼면서도, “아들보다는 딸이 더 귀엽게 느껴진다”고 웃으며 답했다. 여전히 게임과 팀, 그리고 다음 경기를 중심에 두고 있는 이상혁의 일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