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통신업계가 연이은 해킹 사고와 개인정보 유출 위협에 대응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미국 통신시장은 전혀 다른 양상에서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서비스 품질과 요금 경쟁을 넘어, 경쟁사 고객의 계정 접근을 둘러싼 법적 분쟁까지 벌어지며 이른바 ‘무선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이 보안 강화와 신뢰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미국은 경쟁의 경계선 자체를 흔드는 실험에 들어갔다는 분석이다.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미국 이동통신 3사인 AT&T, T모바일, 버라이즌은 그동안 네트워크 품질, 5G 커버리지, 요금 경쟁력을 앞세운 마케팅 경쟁을 이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쟁사 고객을 직접 겨냥하는 ‘전환 유도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갈등의 수위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통신사 간 경쟁이 단순 비교를 넘어 상대방의 시스템과 고객 데이터 영역까지 침범하는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에서 파장이 크다.
버라이즌은 올가을 ‘청구서 가져오기(Bring Your Bill)’ 프로모션을 선보였다. AT&T나 T모바일 이용자가 기존 요금 청구서를 온라인에 업로드하거나 매장에 지참하면, 이를 바탕으로 버라이즌이 맞춤형 대항 요금제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경쟁사의 요금 구조를 공개적으로 비교해 고객 전환을 유도하겠다는 전략으로, 비교 마케팅을 한층 노골화한 사례로 꼽힌다.
T모바일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지난달 출시한 ‘이지 스위치(Easy Switch)’는 AT&T와 버라이즌 고객에게 기존 통신사 계정의 로그인 정보와 비밀번호 입력을 요청한 뒤, 자동화된 도구를 통해 요금을 조회하고 개인별 맞춤 대안을 제시하는 서비스다. T모바일은 ‘15분이면 통신사를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전환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췄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기능은 곧바로 거센 논란을 불러왔다. AT&T는 자사 전산 시스템에 대한 무단 접근 가능성을 문제 삼아 보안 차단 조치를 두 차례 시행했고, 이후 지난달 말 텍사스 연방법원에 T모바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AT&T는 소장에서 ‘이지 스위치’가 자사 시스템에 침입해 고객 계정 정보와 사업 정보를 수집했다며, 서비스 약관 위반과 불법 접근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AT&T는 법원에 T모바일의 자사 시스템 접근 금지와 함께 해당 도구를 통해 취득한 데이터의 전면 폐기를 요청했다. 현재 T모바일의 ‘이지 스위치’ 재가동을 막아달라는 가처분 신청은 계류 중이다. 버라이즌 역시 T모바일의 해당 기능이 고객 개인정보 보호 측면에서 문제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소송에는 참여하지 않은 상태다. T모바일은 이후 온라인 기능을 일부 수정했으나, 법원 제출 자료에서는 서비스가 합법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T모바일 측은 AT&T가 고객 이탈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구를 차단하고 있으며, 이번 소송 역시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라고 반박했다. T모바일 대변인은 “경쟁을 막기 위한 법적 대응”이라고 주장하며 정면 대응에 나섰다. 통신사 간 갈등이 단순한 기술 문제를 넘어, 시장 질서와 소비자 권리 해석까지 확산되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경쟁사 고객의 로그인 정보를 요구하는 방식 자체가 전례 없는 시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로저 엔트너 리콘 애널리틱스 설립자는 “경쟁사 고객의 로그인 정보를 요청하는 것은 통신업계에서 매우 이례적”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보안 사고가 빈번한 상황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이 소비자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번 논란의 이면에는 ‘정밀 가격 경쟁’에 대한 경계심도 깔려 있다. 경쟁사 요금 정보를 대량으로 확보할 경우, 통신사가 고객 개별 요금보다 소폭 낮은 조건을 제시하는 초정밀 맞춤 전략이 가능해진다. 이는 기존의 광범위한 요금제 경쟁과는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시장 경쟁의 룰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최근 미국 통신시장에서 해지율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UBS에 따르면 주요 통신사들의 해지율이 최근 분기 들어 높아지며, 소비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통신사를 옮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신사들은 겉으로는 “전환 장벽을 낮추겠다”고 강조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케팅 공방도 점차 과열 양상을 띠고 있다. AT&T와 T모바일, 버라이즌은 서로의 광고를 문제 삼아 미국 광고 자율기구인 국가광고심의위원회(NAD)에 잇따라 제소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광고 분쟁 자체가 또 다른 광고 소재로 활용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AT&T는 배우 루크 윌슨을 등장시킨 광고에서 “T모바일, 가장 많은 허위 광고 제소를 받은 통신사(T-Mobile most challenged for deceptive ads)”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 NAD는 광고 심의 절차를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다며 방침 위반이라고 판단했고, AT&T에 광고 중단을 요청했다. AT&T는 이에 반발해 NAD를 운영하는 BBB 내셔널 프로그램을 상대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또한 NAD는 AT&T가 문제 삼은 T모바일의 ‘5G 용량 우위’ 광고와 관련해, T모바일이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며 최근 연방거래위원회(FTC)와 주(州) 검찰총장에게 사건을 회부했다. T모바일은 AT&T가 NAD 규칙을 따르지 않는 입장인 만큼, 기밀 정보 공유에 대한 우려로 참여를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조지 휴도퍼 뉴헤이븐대 폼페아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번 사태를 1980년대 ‘콜라 전쟁’에 빗대면서도 “소비자 신뢰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결국 승자는 가장 시끄러운 광고를 하는 기업이 아니라, 통신 경험을 단순하고 공정하며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사업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킹 대응과 신뢰 회복이 핵심 과제로 떠오른 지금, 미국 통신업계의 ‘고객 계정 접근’ 논쟁은 글로벌 통신 시장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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